‘실명 속 빛을 찾다’ 최고의 음악인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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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19.05.07 조회6,348회 댓글0건본문
▲ 음악인 이상재. ⓒ이상재
중학교 시절 클라리넷 접해…중앙대 음대 졸업 후 미국 유학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 결성…지속적 공연 이어가
실명으로 만난 클라리넷
그는 1967년 경남 진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 덕분에 이사를 자주 다녔다. 5세 때 백내장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7세 때 당한 교통사고가 실명으로 이어졌다.
“일곱 살 여름방학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큰 외상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사고가 눈에서 빛을 앗아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너무 어리다 보니 눈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몰랐어요. 겨울방학 때쯤에 어머니가 발견했죠. 물건을 눈에 가까이 대고 보더래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의 진단이 기존의 백내장으로 인해 눈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와 눈에 큰 충격으로 시신경을 다쳤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바로 수술을 받았지요. 눈을 고치려고 삼 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수술을 했지만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다가 열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어요.”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노느라 집에 붙어 있지 않던 개구쟁이였던 아이가 앞이 보이지 않자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집에 있던 전축(지금의 오디오)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자 귀가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음악에 흥미를 갖게 만들었다. 당시 다니던 부산맹학교에는 풍금 한 대밖에 없어서 음악을 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러다 4학년 때 서울로 이사해 서울맹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서울은 부산에 비해 교육 환경이 좋았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다. 5학년 때 학교에 현악 합주부가 생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다.
“5, 6학년 때쯤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음을 들었어요. 기숙사 형들에게 ‘이 악기 이름 아느냐’ 고 물었더니 ‘클라리넷’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며 클라리넷을 하겠다고 졸라 클라리넷을 시작했어요. 밴드부는 관악기로 구성되니까 바이올린은 할 수 없었거든요.”
밴드부 악기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 드려 밴드부 악기를 빌려서 아침저녁으로 연습했다. 부모님께 몇 달을 졸라 중학교 3학년 때 개인 클라리넷을 샀을 때의 기쁨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휘자 로린 마젤의 프랑스 국립관현악단 내한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아 놓은 용돈을 다 털어 1만 2천 원짜리 티켓을 예매하여 3층 맨 뒤 둘째 좌석에 앉았다. 그때가 1982년 3월 2일이고 장소는 세종문화회관이었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7번이 연주됐는데, 클라리넷 음색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 순간 클라리넷을 공부하겠다고 확실하게 진로를 결정했죠.”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반대를 하셨다. 특수교육학과에 진학을 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려 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맹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대학에 가려면 혼자서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입시 준비를 위해 레슨을 받았지만 점자 악보가 없어서 선생님이 연주해 주면 멜로디를 외워 가며 공부를 하였다.
전문 음악교육
대학에 입학을 할 때는 시각장애 때문에 원서조차 받아 주지 않는 대학도 있었고 합격을 하고서도 불합격의 위험에 처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4년 후 중앙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할 때는 수석 졸업이란 결과를 얻었다.
중앙대 음대를 마친 그는 199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각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가르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해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동생과 둘이서 영한사전을 가져다 놓고 끙끙대면서 대학원 원서를 작성했다.
합격통지를 받은 후 35㎏짜리 가방 4개를 들고 혼자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미국 대학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미국 3대 음악대학인 피바디 음악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6년에 마치고(조기졸업), 1997년 국내는 물론 미국 피바디음악대학 150년 사상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관현악 부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을 썼던 마지막 6개월 동안 하루 2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환청까지 들렸지만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이겨 냈다. 장애인은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하니 미국에 머무르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1997년 귀국을 해서 연주 외에 출강과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중앙대학교, 총신대학교, 한세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음악강사로 강의하고 계원예고에서도 학생을 가르치며 모교에서 교수 임용이 되기를 고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미국 유명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한 것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지만 대학은 냉소적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것이다. 부인은 시각장애인도서관에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부인의 내조 속에 그는 사회 활동을 왕성히 할 수 있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재능이 있는 시각장애 음악인들이 공연 기회를 갖지 못해 좌절하고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시각장애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지 못해 월급을 주는 관현악단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시각장애 음악인들로 구성된 세계 유일의 오케스트라인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를 2007년에 결성했다.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는 시각장애연주자 12명, 비장애연주자 4명으로 출발했다. 비장애연주자는 시각장애인이 주로 다루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금관악기 등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했다.
합주는 그야말로 난관의 연속이었다. 연주자들이 지휘자는 물론 단원끼리도 볼 수 없는 탓에 점자악보로 연주곡을 통째로 외우고 한 곡당 연습을 수백 번 반복해야 했다. 연습할 때는 이 단장이 드럼스틱으로 의자를 두드려 가며 지휘하고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나지막한 구령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서로 눈빛을 교환할 수 없지만 서로를 믿고 연주하다 보니 뛰어난 하모니를 만들어 냈다. 공연 횟수가 늘었다. 2011년 10월과 2015년 두 차례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도 가졌다. 특히 2011년 10월 27일 뉴욕 카네기홀 공연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공연은 카네기홀 개관 120년 만에 처음이었기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최고의 공연이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무대 카네기홀은 개관 이후 처음으로 공연장 불을 모두 끄는 암전 무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시각장애연주자들이 보조단원들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고 악기를 들고 자리를 잡은 뒤에 무대와 객석 모두 어둠으로 물들었다. 지휘자도, 악보도 없이 ‘하나 둘 셋 넷’ 구령 이후 2시간 동안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 등 14곡이 연주됐다.
조명이 다시 켜지자 관객 600여 명은 일어나 4차례 박수를 보냈고 이들은 3차례 앙코르 연주를 했다. 어려움 속에 성사된 카네기 공연은 미국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로 밀려오는 관객 때문에 단원들이 30여 분이나 대기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미국시각장애인협회에서 온 사람들은 ‘한국에 이렇게 멋진 단체가 있었느냐’며 ‘시각장애인으로서 자랑스럽다’고 말해 주더군요. 뉴욕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환자를 돕는 어려운 일을 하는데 이 콘서트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지요.”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는 현재 시각장애인 13명과 비장애인 8명으로 모두 21명이 활동하고 있다. 2007년 7월 서울 영산아트홀에서 가진 창단연주회 이후 지금까지 400여 회에 이르는 공연을 해 왔다. 레퍼토리도 이제 200곡 이상 확보했다.
국내외에서 연주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시각장애음악인과 일반 음악인의 협연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느라고 이상재는 이곳저곳 공모사업에 응모하느라고 사업계획서를 쓰느라 밤을 새우고 운영비를 마련하느라고 문화재단과 기업에 찾아다니며 지원을 요청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웃었다.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긍정의 힘이 있는 듯하다.
2014년도에 문화부 사회적협동조합 1호로 법인 인가를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운영은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장애인음악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아서 오케스트라의 진가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상재 박사는 현재 나사렛대학교 관현악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시각장애아들을 훌륭히 키운 부모님 모두 건재하시고, 아내와 두 딸이 있는 가정은 행복하다. 가정을 지키고 오케스트라를 열심히 운영하기 위해 12년째 수영으로 건강 관리를 하고 있다. 이상재 박사는 음악성이나 삶의 궤적에서 최선을 다해 정상에 이른 최고의 음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상재
나사렛대학교 음악학부 관현악과 부교수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 이사장 겸 음악감독
# 학력
1990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관현악과 수석 졸업 1993 PEABODY CONSERVATORY OF MUSIC, 석사학위 (Master Of Musical Degree) 1997 PEABODY CONSERVATORY OF MUSIC, 박사학위 (Doctor Of Musical Arts Degree)
# 수상 경력
1988 제5회 부산음악콩쿠르 입상 1997 PEABODY LYNN TAYLOR HEBDEN PRIZE IN PERFORMANCE 2005 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 2011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2006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음악 부문) 2009 올해의 장애인상(대통령상) 2014 대한민국 장애인문화예술상 대상 2015 제2회 이승휴문화상
# 음반
2003 브람스 탄생 170주년 기념 앨범 독집음반 발매 2004 크로스오버 음반 발매 2006 크로스오버 음반 발매 2008 <이상재의 편지 Painted Times II> 발매 2014 발매
# 저서
「그래 네 마음은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단다」(2006)
「서양음악 점자해설」(2019)
독주회: 20여 회
협연: 우크라이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토쿄 게이다이 필하모니, 파나마 국립교향악단, 서울바로크합주단, 대전시향, 인천시향 등 국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80여 회\
해외연주: New York UN 본부, Hong Kong City Hall,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문화예술회관스위스 UN 본부,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극장 등 50여 회
실내악 연주회: 300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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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한국장애예술인협회 (klah1990@hanmail.net)
출처: 에이블뉴스(201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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