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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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19.06.10 조회5,499회 댓글0건본문
여러분은 만일 우리 정부가 여러분의 신분증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그렇다’와 ‘아니다’ 둘로 나눠 표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는가를 기준으로 ‘교육의 수준이 높은 사람/높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다거나, 거주하고 있는 집의 소유권을 따져 ‘거주지가 본인 명의인 사람/본인 명의가 아닌 사람’으로 나눈다면 말입니다.
또 개인의 다양한 조건을 평가해 ‘결혼할 능력이 되는 사람/결혼을 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 등의 문구가 본인의 신분증에 표시된다면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1. ‘장애인등록증’이란?
우리 정부는 정부가 시행하는 여러 복지정책에 따라,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장애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장애인등록증’이란 신분증을 발급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복지법> 제32조에 근거해 발급되는 ‘장애인등록증’엔 복지카드라는 명칭과 함께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발급 연월일과 장애등급이 적혀 있고, 개인의 증명사진과 거주지 기초자치단체장의 직인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2. ‘장애등급’이란?
이중 장애 유형과 정도를 구분하는 ’장애등급‘은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 제2조에 명시된 [별표1]을 참조해, 15개 장애 유형마다 1급에서 6급까지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 팔 모두 손목 관절 밑으로 없는 사람은 지체 1급으로 표시되지만, 한 손의 엄지손가락만 없는 사람은 지체 6급으로 표시되는 것처럼 장애 유형에 따라 정도 차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래 대한민국 법률이 규정한 장애의 유형은 1981년 6월에 처음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에 따라, 이듬해 2월 시행된 <심신장애자복지법 시행령>이 기준으로 삼은 5가지 분류가 시초였습니다.
이에 근거해 1982년 5월 시행된 <심신장애자복지법 시행규칙>이 장애 정도에 따라 모든 유형을 각기 1급부터 6급까지 나누었으며, 장애 유형이 10개로 늘어난 2000년 1월과 다시 15개로 늘어난 2003년 7월 개정 때에도 이 기준이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3. 뒤늦은 ‘장애등급’의 문제점 인식
하지만 장애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크게 부족했던 과거에 부실한 심사와 부정한 방법으로 등급이 부풀려져, 이른바 나이롱 장애인의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러한 문제가 공론화된 2007년을 전후해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는 보수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에 들어 보건복지부는 장애인차량 LPG할인 지원정책을 폐지하는 대신 장애수당을 인상하기로 했고, 이러한 방침에 따라 국민연금관리공단이 그해 여름, 신규 등록장애인과 장애등급 재판정 시기가 도래한 중증장애인 6,926건을 대상으로 장애판정심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조사결과 신청등급보다 상향 조정된 경우는 전체의 1.1%였지만 하향 조정된 경우가 전체의 35.2%에 달했으며, 이런 통계는 장애수당 부정수급에 대한 실태뿐만 아니라 장애등급제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장애등급
시작은 장애인차량 LPG할인 지원정책 폐지와 연동시킨 장애수당 인상이었지만, 본질적 목적은 장애수당 인상을 명목으로 등록장애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심사였습니다. 정부는 재심사를 감행할 경우 30% 이상의 등급이 하향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줄인 복지예산을 성장정책에 투입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장애수당을 새롭게 주거나 더 준다는 명목으로 대대적 재심사가 감행되었고, 큰 염려 없이 이에 응했던 기존 등록장애인들은 엄격해진 새 기준에 따라 대거 등급이 하향되는 혼란스러운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장애등급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장애인들은 정부의 속내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2010년 7월부터 시행된 장애인연금 정책으로 다시금 재심사 광풍이 몰아치자 그제야 장애등급의 구조적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5. 대안이 미흡했던 폐지 요구, 귀를 막고 있던 정부
그렇지 않아도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리프트 추락사고를 기점으로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기름통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는데, 장애수당과 장애인연금을 볼모로 한 정부의 등록장애인 축소 전략은 그곳에 크게 불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장애유형에 따라 신체적, 정신적 특성도 다르고 사회적 요구도 다른데, 모두 같은 등급으로 인정되고 지원을 받는 게 부당하다는 것이 자각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공공서비스를 이용함에 있어서도 장애별 특성은 무시하고, 단지 급수에 따라 혜택이 달라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장애인을 고기처럼 등급을 나눠 대하지 말라! 장애특성을 무시한 천편일률적 6등급 체계를 폐지하고, 각자의 사회적 요구를 파악해 그에 합당한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라!’ 그래서 이러한 요구는 결국 ‘장애등급제 폐지’라는 구호로 귀결되게 됩니다.
하지만 정부는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었습니다. 이후 수차례 크고 작은 선거가 있었지만, 정치인들은 말로만 폐지를 약속할 뿐 실천에 옮기진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기형적 제도였지만 장애인 단체들도 이를 폐지한 이후의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정부 역시 폐지 이후의 청사진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후 한동안 장애계의 ‘장애등급제 폐지 요구’와 정부의 ‘지키지 않는 폐지 약속’만 지루하게 오고 갈 뿐이었습니다.
6. 드디어 움직인 정부, 그러나 내용은 조삼모사
평행선을 달리던 장애계와 정부는 2017년 5월, 보건복지부가 장애인단체 관계자들에게 <장애인등급제 개편 시범사업 계획안>을 발표하면서부터 겨우 변화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기존 6등급이던 장애등급 체계를 2단계로 나눠, 1~3급은 중증장애인으로 규정하고, 4~6급은 경증장애인으로 구분한다는 내용이 그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등급제는 2019년 7월부터 전면 시행하기로 확정되었고, 이후 모든 등록장애인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복지서비스는 정부에서 마련한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표’를 바탕으로 제공하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입니다.
아직 과도기 단계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정부에서 제공한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표’를 모의평가해본 장애인 단체들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내용에 다시 큰 실망을 표하고 있습니다.
1~3급이 중증, 4~6급이 경증으로 명칭만 변경되었을 뿐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표’ 또한 장애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7. 오는 7월부터 저는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 됩니다.
제도가 새롭게 개편되면서 등록장애인 여부를 증명하는 신분증 ‘장애인등록증’도 그 모습을 새롭게 바꿀 계획이라고 합니다. ‘복지카드’라는 명칭은 ‘장애인등록증’으로 변경되고, 영문으로 ‘Disability Card’라는 문구가 추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장애유형과 등급을 표시했던 영역은 어떻게 바뀔까요?
놀랍게도 앞으로 중증장애인으로 통합되는 1~3급 장애인은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으로 표기하고, 경증장애인으로 통합되는 4~6급 장애인은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표기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다가오는 7월부터 지체 2급을 판정받고 살아온 저는 저의 신분증에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라는 문구를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천적 희귀난치성질환인 골형성부전증을 가지고 태어난 저는 현재 만 38세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95cm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습니다. 20살이 되기 전까지 서른 번이 넘는 골절을 감내해야 했고 힘겨운 수차례의 수술을 이겨내야 했지만, 단 한 번도 포기하거나 외면하거나 변색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여건을 가지고 있지만 봉제인형의 눈을 붙이는 부업에서부터 시작해 한 달에 30만 원도 채 안 되던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인턴부터 계약직, 정직원, 임원에 창업까지 무수히 많은 도전과 경험을 이어 왔습니다.
더군다나 대학 시절부터 2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애가 있는 후배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잘못된 인식을 가진 이들을 찾아가 인식개선 강의 활동도 해왔습니다. 스스로 장애는 삶의 영양소라 여기며 살아왔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장애인도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일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지내왔습니다.
이런 제가 오는 7월부터 보건복지부의 방침에 따라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병원비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의 병원비를 연결해주고, 휠체어가 없어 집에만 있는 사람들에게 휠체어를 기증해주며, 학교에 못 가 집에만 있는 아이들의 진학을 돕고 장학금을 전달해오며 살았던 제가 어느날 갑자기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8. 저는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 아닙니다.
기존 6등급 체계를 폐지하면서 정부가 내놓은 2단계 개편안은 다분히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에 따른 조삼모사 처방에 불과합니다. 장애인에게 제공해야 할 공적 서비스를 필요한 욕구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용적 측면에서만 보고 쉽게 대하고자 하는 안일한 태도인 것입니다.
저는 단 한번도 제 스스로를 장애가 심한 사람이라 여긴 일이 없습니다. 다른 여러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보낸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식판을 들어주고 물컵을 가져다 주며, 친구들의 청소와 빨래를 돕던 사람이 저였습니다.
아직 저보다 힘겨운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 받지 못했지만, 매 선거 때마다 도전해 장애인 그리고 청년을 위해 의회에 진출하겠다 외쳐왔던 사람이 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강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9. 조금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는 7월로 예정된 장애인등급제 개편을 이런 조삼모사의 태도로 추진해선 안됩니다. ‘이상한 제도’를 고치자고 했더니, ‘어차피 이상한 제도’로 바꾸려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등록장애인 여부를 확인하는 장애인등록증에 장애정도를 표시하는 시대착오적 방침을 철회하길 바랍니다. 행여 행정적 편리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카드의 색깔을 달리 하거나, 픽토그램을 넣어 필요한 공적 서비스를 표기해주면 됩니다.
통계청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초고령화 사회를 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2018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대비 14.3%(약 738만 명)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인인구 10명당 9명이 크고 작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당면한 노인세대와 그러한 노인세대를 부모로 둔 모두가 ‘장애의 정도가 심하다, 심하지 않다’고 표시된 ‘장애인등록증’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또한 여기엔 장애인 인구가 전체 국민의 5% 이상이면서도 매 선거 때마다 약속해오던 ‘국가장애인위원회’ 설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복지정책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할 콘트롤 타워가 부재하고, 청와대 안에도 이러한 업무를 담당할 장애인 당사자 하나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한 축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개혁의 길로 접어 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땜질식 처방은 제2, 제3의 차별과 편견을 양산할 뿐입니다.
10. 정부와 보건복지부에 요구합니다!
상기한 여러 문제의 본질적 해결을 위해 정부와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에 요구합니다! 먼저 장애인정책을 총괄 관리할 ‘국가장애인위원회’를 설치해주십시오! 더불어 청와대 내에 장애인 당사자인 수석 또는 비서관을 인선해, 관련 사안을 주도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주길 바랍니다.
보건복지부 역시 부적절한 대안으로 추진 중인 조삼모사 장애등급제 폐지를 전면 재정비 할 것을 촉구하며, ‘장애의 정도가 심한/심하지 않은’으로 표기하려는 ‘장애인등록증’ 변경안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글은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김영웅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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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영웅 기고/김영웅블로그 (ablenews@ablenews.co.kr)
출처: 에이블뉴스( 2019-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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