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장애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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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22.07.07 조회4,001회 댓글0건본문
▲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ENA 방송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자폐성 장애인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드라마 제목에서 ‘이상한’이란 표현은 장애를 두고 한 말일까? 이상하다는 말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말인지, 특이하거나 색다르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신기하다는 말인지 정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지만, 장애를 이상하다고 표현을 하였다면 제대로 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이상하다’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변호사가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 즉 사건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법의 적용에서나 승소할 유리한 자료나 포인트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한다면, 여기서 이상한 것은 색다르고 특이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이상하다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처음 대하는 인상에서 변호사의 대응 방식이 색다르다는 의미로 ‘이상한’이란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상한 점이 교묘하게 섞인다. 우리는 과거 ‘굿닥터’라는 드라마를 기억할 것이다. 자폐성 장애인이 의사가 되어 다른 의사들이 찾지 못하는 수술 방식을 찾아내기도 하고, 의학 논문에 대해서는 줄줄이 외우면서 직접 수술을 시도하기에는 자신감이 없어 하면서 장애와 재능을 오가며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사실 저장 능력과 저장된 기억 중에서 필요한 것을 검색해 내는 능력 모두를 한 번에 가지기는 쉽지 않다. 서번트 장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자폐성 장애인이 기억력이 월등하여 줄줄이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에서 법의 적용의 불리한 상황에서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조문이나 판례를 찾아내는 능력도 월등하다. 인간 AI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AI도 장애인일 수 있다. 직접은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으나, 엄청난 데이터 처리나 축적된 정보를 분석하여 판단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이런 장애를 우리는 천재 장애인 즉 서번트라고 하는데, 드라마에서 서번트의 등장은 어떤 의미일까?
드라마 ‘덕이’에서 남동생이 장애를 입고 낙담하고 능력이 있는 덕이와 비교되면서 자신도 무엇인가 해 보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장애를 비관하기도 하고, 이겨내려고도 하는 모습은 애처로움과 무거운 부담감을 시청자들에게 준다. 그러나 천재 장애인을 등장시켜 그런 무게감을 줄이면서 천재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의 사랑을 엮어 가볍게 감동을 연출하면 흥미가 있으면서 무난하게 스토리를 이어나갈 수 있다.
장애학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은 진정한 장애인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다. 시청자들은 자폐성 장애인 상당수는 재능을 제대로 발견하고 키워주지 못해서 그렇지, 특별한 부분에는 분명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만든다. 다수를 차지하는 장애인이 아닌 특별한 장애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왜곡된 장애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장애를 말하면서 능력주의를 기준으로 장애를 바라보게 한다. 장애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능력주의 자체가 인권주의에 의해 조절 당해야 하는 것이 장애 인식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장애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려는 움직임이 일부에서 시도하고 있는데 특별한 능력, 또 다른 능력, 개성이 차이나는 사람 등으로 부르고자 한다. 장애를 보지 말고 잔존 능력을 보자는 것은 찬성한다. 장애를 또 다른 능력을 가진 자로서 능력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가 수용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장애를 천재화하여 특별한 능력자로 만드는 것 같은 신화 만들기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서번트 장애인들의 드라마가 장애를 특별한 능력자라는 말을 오해하여 장애는 있지만 특별한 영역에서는 천재라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보고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를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으나, 모든 장애인들에게 그런 능력을 요구하거나, 그런 긍정적 신화를 꿈꾸다가 당신은 왜 그런 능력이 없느냐며 부정적 시각으로 돌아서거나, 장애는 천재라는 잣대에서 좋게 여겼었는데 사실은 그것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뒤에 생각을 수정할 기회가 온다면 가장 긍정적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천재가 가장 긍정적인 것이란 설정 자체부터가 문제다.
일정 부분은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의 자긍심과 사회적 기여 면에서도 소중한 것이며, 일부 어려운 점은 있으나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는 것이 과제라는 정도가 또 다른 능력이라면 자폐성 천재 역시 일부에서는 불편하고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특별한 주제(드라마에서는 고래이야기)에 관심이 집착되어 있고, 잘할 수 있는 것과 잘하기 어려운 것이 공존한다.
이 드라마는 조성우 변호사가 쓴 수필집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라는 수필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조성우 변호사의 수필집은 주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소송 이야기를 적고 있으며, 그런 사건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고자 한 내용이다. 물론 장애 이야기는 전혀 없다.
조 변호사가 사건의 해결 방안을 기발하게 찾아 능력 있는 변호사로 인정받은 이야기가 드라마 속에서는 천재 자폐성 장애인 우영우가 하는 역할로 나타낸다. 일반적인 사건 접근 방식보다 특이하게 접근하여 해결하는 것이 장애인이면 더 흥미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애라는 무거운 감정을 가볍게 하면서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자아실현 모습으로 다룰 수 있어 편하기도 하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만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진정한 장애에 대한 참모습을 대표성 있게 그려내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다.
조성우 변호사는 수필집 후기에서 소송을 당한 사람의 감정 단계를 언급한다. 처음에 소송을 당하면 충격상태(쇼크)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된다. 좀 시간이 지나면 화가 나서 내가 얼마나 잘 해 주었는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냐며 흥분하고 화난 상태가 지속된다.
다음 단계는 죄책감으로 운명론자가 된다. 내가 원래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 시련이 왔다거나 좀더 잘 해 주었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감정이다. 피소를 당한 반성이라기보다 운명론적 죄책감이나 자책감이다. 다음 단계로 우울감이다. 나는 되는 일이 없다거나, 세상은 살 만한 것이 못된다거나,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극도로 슬픈 상태가 된다.
다음 단계가 이런 슬픔을 이겨내고 피소를 수용하거나 판결을 수용하면서 삶을 적응해 나간다. 트라우마가 남지 않는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기에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충격상태에 머무르게 되고, 어떤 사람은 화난 상태에 머무르게 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기로 항소를 하거나, 감정이 상해서 괴롭히기 위해 소송을 전개하기도 한다.
조 변호사는 소송으로 갈등을 가지는 것보다 사전에 서로 이해하고 합의하여 감정 충돌을 피하는 해결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며, 때로는 인간적 접근이 법조문을 들이대는 협박적 접근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물론 법적 협박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상대가 인간적인가가 기준일 것이다. 서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며 다투다가 상대의 부모 초상에 문상을 하고 화해가 된 사례 등이 결국 소송도 갈등의 해결 방법의 하나로 다른 접근 방식이 있으며, 사건 핵심과 정확한 판단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이해가 더 중요한 경우도 있다.
피소를 당했을 때에 감정 단계는 남녀 간의 이별 통보를 받았을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처음에는 농담이지 하면서 믿지 않고, 쇼크를 받은 멍한 상태가 오고, 화가 나고, 죄책감을 느끼다가 우울증에 빠진다. 우울의 바닥을 차고 나와야 해결된다.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도 같은 단계를 가진다.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경우, 믿지 못하고, 의학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정하게 되고,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화가 나고, 나의 죄로 자식이 하면서 탓을 따지며 죄책감을 느끼고, 우울증에 빠진다. 왜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가 하면서 용기를 내고 오기가 생기면 우울에서 탈출한다. 선천성 장애라면 부모가, 후천성 장애라면 장애인 당사자가 이런 감정 단계를 거친다.
최근 장애학에서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수용과정이라고 표현하던 것을 단지 장애에 대한 반응이라고 표현을 달리 수정하고 있다. 장애학에서 장애를 감정의 단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반응이므로, 수동적 태도 변화로만 인식하는 것에 비판을 하고 있다.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적 사건, 상실의 경험 등에서 받는 감정의 흐름은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거치고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단계에서 머무르면서 스스로 자존감을 찾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수용 태도는 전문가의 도움보다는 동료 장애인의 도움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되면 시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실명 상태를 새로이 얻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장애는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양식을 얻었다고 말한다. 장애는 몸의 변화가 아니라 의식의 변화로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장애사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와 자신의 몸이 아닌 변화된 의식을 찾고, 배척에서 포용으로, 수치심에서 자부심으로 변해야 한다. 장애는 몸의 변화가 아닌 의식의 변화를 의미해야 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장애 사회에서 생활의 참모습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이런 의식의 변화된 장애는 분명 보여주고 있다. 시청자들이 장애인들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장애인이 많다고 여기는 오해는 하지 않으면서 이런 당당한 자부심을 가진 장애인의 모습은 발견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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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변호사가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 즉 사건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법의 적용에서나 승소할 유리한 자료나 포인트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한다면, 여기서 이상한 것은 색다르고 특이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이상하다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처음 대하는 인상에서 변호사의 대응 방식이 색다르다는 의미로 ‘이상한’이란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상한 점이 교묘하게 섞인다. 우리는 과거 ‘굿닥터’라는 드라마를 기억할 것이다. 자폐성 장애인이 의사가 되어 다른 의사들이 찾지 못하는 수술 방식을 찾아내기도 하고, 의학 논문에 대해서는 줄줄이 외우면서 직접 수술을 시도하기에는 자신감이 없어 하면서 장애와 재능을 오가며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사실 저장 능력과 저장된 기억 중에서 필요한 것을 검색해 내는 능력 모두를 한 번에 가지기는 쉽지 않다. 서번트 장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자폐성 장애인이 기억력이 월등하여 줄줄이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에서 법의 적용의 불리한 상황에서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조문이나 판례를 찾아내는 능력도 월등하다. 인간 AI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AI도 장애인일 수 있다. 직접은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으나, 엄청난 데이터 처리나 축적된 정보를 분석하여 판단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이런 장애를 우리는 천재 장애인 즉 서번트라고 하는데, 드라마에서 서번트의 등장은 어떤 의미일까?
드라마 ‘덕이’에서 남동생이 장애를 입고 낙담하고 능력이 있는 덕이와 비교되면서 자신도 무엇인가 해 보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장애를 비관하기도 하고, 이겨내려고도 하는 모습은 애처로움과 무거운 부담감을 시청자들에게 준다. 그러나 천재 장애인을 등장시켜 그런 무게감을 줄이면서 천재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의 사랑을 엮어 가볍게 감동을 연출하면 흥미가 있으면서 무난하게 스토리를 이어나갈 수 있다.
장애학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은 진정한 장애인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다. 시청자들은 자폐성 장애인 상당수는 재능을 제대로 발견하고 키워주지 못해서 그렇지, 특별한 부분에는 분명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만든다. 다수를 차지하는 장애인이 아닌 특별한 장애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왜곡된 장애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장애를 말하면서 능력주의를 기준으로 장애를 바라보게 한다. 장애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능력주의 자체가 인권주의에 의해 조절 당해야 하는 것이 장애 인식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장애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려는 움직임이 일부에서 시도하고 있는데 특별한 능력, 또 다른 능력, 개성이 차이나는 사람 등으로 부르고자 한다. 장애를 보지 말고 잔존 능력을 보자는 것은 찬성한다. 장애를 또 다른 능력을 가진 자로서 능력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가 수용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장애를 천재화하여 특별한 능력자로 만드는 것 같은 신화 만들기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서번트 장애인들의 드라마가 장애를 특별한 능력자라는 말을 오해하여 장애는 있지만 특별한 영역에서는 천재라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보고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를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으나, 모든 장애인들에게 그런 능력을 요구하거나, 그런 긍정적 신화를 꿈꾸다가 당신은 왜 그런 능력이 없느냐며 부정적 시각으로 돌아서거나, 장애는 천재라는 잣대에서 좋게 여겼었는데 사실은 그것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뒤에 생각을 수정할 기회가 온다면 가장 긍정적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천재가 가장 긍정적인 것이란 설정 자체부터가 문제다.
일정 부분은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의 자긍심과 사회적 기여 면에서도 소중한 것이며, 일부 어려운 점은 있으나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는 것이 과제라는 정도가 또 다른 능력이라면 자폐성 천재 역시 일부에서는 불편하고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특별한 주제(드라마에서는 고래이야기)에 관심이 집착되어 있고, 잘할 수 있는 것과 잘하기 어려운 것이 공존한다.
이 드라마는 조성우 변호사가 쓴 수필집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라는 수필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조성우 변호사의 수필집은 주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소송 이야기를 적고 있으며, 그런 사건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고자 한 내용이다. 물론 장애 이야기는 전혀 없다.
조 변호사가 사건의 해결 방안을 기발하게 찾아 능력 있는 변호사로 인정받은 이야기가 드라마 속에서는 천재 자폐성 장애인 우영우가 하는 역할로 나타낸다. 일반적인 사건 접근 방식보다 특이하게 접근하여 해결하는 것이 장애인이면 더 흥미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애라는 무거운 감정을 가볍게 하면서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자아실현 모습으로 다룰 수 있어 편하기도 하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만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진정한 장애에 대한 참모습을 대표성 있게 그려내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다.
조성우 변호사는 수필집 후기에서 소송을 당한 사람의 감정 단계를 언급한다. 처음에 소송을 당하면 충격상태(쇼크)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된다. 좀 시간이 지나면 화가 나서 내가 얼마나 잘 해 주었는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냐며 흥분하고 화난 상태가 지속된다.
다음 단계는 죄책감으로 운명론자가 된다. 내가 원래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 시련이 왔다거나 좀더 잘 해 주었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감정이다. 피소를 당한 반성이라기보다 운명론적 죄책감이나 자책감이다. 다음 단계로 우울감이다. 나는 되는 일이 없다거나, 세상은 살 만한 것이 못된다거나,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극도로 슬픈 상태가 된다.
다음 단계가 이런 슬픔을 이겨내고 피소를 수용하거나 판결을 수용하면서 삶을 적응해 나간다. 트라우마가 남지 않는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기에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충격상태에 머무르게 되고, 어떤 사람은 화난 상태에 머무르게 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기로 항소를 하거나, 감정이 상해서 괴롭히기 위해 소송을 전개하기도 한다.
조 변호사는 소송으로 갈등을 가지는 것보다 사전에 서로 이해하고 합의하여 감정 충돌을 피하는 해결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며, 때로는 인간적 접근이 법조문을 들이대는 협박적 접근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물론 법적 협박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상대가 인간적인가가 기준일 것이다. 서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며 다투다가 상대의 부모 초상에 문상을 하고 화해가 된 사례 등이 결국 소송도 갈등의 해결 방법의 하나로 다른 접근 방식이 있으며, 사건 핵심과 정확한 판단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이해가 더 중요한 경우도 있다.
피소를 당했을 때에 감정 단계는 남녀 간의 이별 통보를 받았을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처음에는 농담이지 하면서 믿지 않고, 쇼크를 받은 멍한 상태가 오고, 화가 나고, 죄책감을 느끼다가 우울증에 빠진다. 우울의 바닥을 차고 나와야 해결된다.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때에도 같은 단계를 가진다.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경우, 믿지 못하고, 의학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정하게 되고,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화가 나고, 나의 죄로 자식이 하면서 탓을 따지며 죄책감을 느끼고, 우울증에 빠진다. 왜 세월을 낭비하고 있는가 하면서 용기를 내고 오기가 생기면 우울에서 탈출한다. 선천성 장애라면 부모가, 후천성 장애라면 장애인 당사자가 이런 감정 단계를 거친다.
최근 장애학에서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수용과정이라고 표현하던 것을 단지 장애에 대한 반응이라고 표현을 달리 수정하고 있다. 장애학에서 장애를 감정의 단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반응이므로, 수동적 태도 변화로만 인식하는 것에 비판을 하고 있다.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적 사건, 상실의 경험 등에서 받는 감정의 흐름은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거치고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단계에서 머무르면서 스스로 자존감을 찾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수용 태도는 전문가의 도움보다는 동료 장애인의 도움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되면 시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실명 상태를 새로이 얻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장애는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양식을 얻었다고 말한다. 장애는 몸의 변화가 아니라 의식의 변화로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장애사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와 자신의 몸이 아닌 변화된 의식을 찾고, 배척에서 포용으로, 수치심에서 자부심으로 변해야 한다. 장애는 몸의 변화가 아닌 의식의 변화를 의미해야 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장애 사회에서 생활의 참모습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이런 의식의 변화된 장애는 분명 보여주고 있다. 시청자들이 장애인들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장애인이 많다고 여기는 오해는 하지 않으면서 이런 당당한 자부심을 가진 장애인의 모습은 발견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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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서인환 (rtech@chol.com)
출처:에이블뉴스( 202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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