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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그리고 자연인 ‘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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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22.08.08 조회3,7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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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낙인을 받으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2022 오티즘 엑스포’에서의 발표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히트로 세바다에도 취재 요청이 꽤 들어왔다. 활동가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취재 요청을 받은 활동가분께서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과 얼굴, 진단명을 함께 공개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당사자들처럼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모든 활동가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칼럼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2020년까지만 해도 나는 정신장애가 있긴 해도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중상위권의 성적을 받아 지방 거점 국립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국어국문학과 행정학을 복수전공했다. 국어국문학은 고3 때 ‘문법학자가 다 되었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국어학에 심취하였기에 정한 주전공이고, 행정학은 부모님의 권유로 복수전공을 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 나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중앙동아리 집행부를 4년 동안 할 정도로 적극적인 면모가 있었고 토익, 대외활동 등도 해나갔다. 그러면서도 졸업 평점이 4.5 만점에 4.22를 기록할 정도로 학업에 열의가 있었다.

나는 안정성을 몹시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사회 변혁을 지지하면서도 운동(movement)이나 시위, 정당, 단체 활동을 꺼렸다. 그러면서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부모님이 정하고 나도 동의한 진로는 역시 공무원이었다. 공무원 인강을 1년치 결제하여 착실히 수업을 들으면서 공무원의 꿈을 키워나갔다.

어느 순간 나와 나의 진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계기는 2020년 11월 ‘신경다양성 톡방’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신경다양인’에 대한 글을 읽고 ‘이건 내 얘기다’ 공감하며 몇 번 SNS에 글을 썼다. 그것이 조금 호응을 받았고, ‘신경다양성 톡방’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나의 신경다양인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으나, ‘신경다양성 톡방’ 방장분이 내가 신경다양인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여 당사자 회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신경다양성 톡방’은 당시 변화의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변화 중 한 가지는 모임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여러 후보가 물망에 올랐고, 그중에서는 내가 제안한 ‘조금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투표 끝에 모임 이름이 ‘세바다(세상을 바꾸는 다양성, 3Oceans)’로 정해졌다.

마침 한 분께서 신경다양성 단체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몇몇 인원이 동의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갈등이 오간 끝에 3명의 인원으로 ‘세바다 단체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런저런 일을 경험한 후에, 단체준비위원회의 대표는 먼저 발의한 그분이 아닌 내가 되어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대표가 되니 신경다양성 운동에 진심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 뒤로는 공무원 시험을 공부할 시간을 아껴가면서 단체 활동을 했다. 신경다양인에게 중요한 이슈가 발생하면 달려가서 성명서를 썼다. 단체 명의로 나가는 칼럼과 카드뉴스도 열심히 썼다.

세바다 단체를 임의단체로 등록한 이후에는 더더욱 열심히 뛰었다. 1차까지 붙었지만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공무원 진로는 완전히 포기했다. 명함을 제작해서 돌리면서 내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에이블뉴스 칼럼니스트 활동을 올해 1월부터 시작했는데, 남들도 다 그런다는 이유에서 본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3월에는 신경다양성 포럼을 진행했다. 자료집에 내 본명이 적혔다. 포럼 영상이 유튜브로 송출되면서 내 얼굴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비추는 행사가 점점 많아졌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2022 오티즘 엑스포’ 활동을 진행하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7월에는 정신장애 대안언론인 ‘마인드포스트’에서 본명과 사진이 함께 실린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대표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굴과 본명을 가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이들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당사자들이 얼굴과 본명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상 공개에 대해 점점 더 개의치 않게 행동했다.

그러나 개인 신상 정보를 당당하게 공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악영향이 갈 수 있는 행위였다. 활동가로서의 내가 성장하고, 얼굴과 본명이 언론에 공개될수록 내가 설 수 있는 진로가 좁아져 갔다. 기업은 시민사회 운동을 하는 활동가를 ‘불의를 못 참는다’며 좋아하지 않는다. 어렵사리 직장을 구한다고 해도 단체 대표인 나의 부업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적 장애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당사자 사이에서 금기로 여겨지던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성격장애인’이었다. 현재까지도 정신적 장애, 그것도 성격장애를 스스로 밝히는 것은 ‘사회적 자살’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정신건강 에세이 작가 장우석 님은 2020년 1월 기고에서, ‘당사자임을 고백하고 동료지원가나 강연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생활의 어려움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일 년간 열심히 살았지만 정신장애를 세상에 밝히면서 일반 직장에 취직은 꿈으로만 그쳤습니다. 아무도 저를 뽑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작가는 서른 곳 넘는 직장에 이력서를 냈지만 모두 낙방했다고 한다. 그는 정신장애 인권에 대해 강한 소명의식이 있었으나 현실의 벽 앞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정신장애인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은 이토록 힘겨운 일이다.

‘장애의 무게’를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드러내도 쉽게 환영받기 어렵다는 것을. 그렇기에 신경다양성 운동이 더욱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까지 낙인을 받으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이 밀려 온다.


칼럼니스트 조미정 (applemintr@gmail.com)


출처: 에이블뉴스(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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