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손을 소독하려고 뿌렸는데 파스 냄새가 났다. 그제서야 손소독제가 아닌 걸 알았다. 약을 먹다가 다른 약과 헷갈려 사고가 날까봐 항상 불안하다."

"집에 있는 약5개 중 어떤 게 소화제고 어떤 게 진통제인지 구분이 안 된다. 매번 가족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혼자 있을 땐 그냥 안 먹거나 찍어서 앱으로 물어본다."

【에이블뉴스 이슬기 기자】약사법 개정으로 의약품에 점자 표기가 의무화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시각장애인 10명 중 9명은 여전히 약 정보를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6일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발간한 ‘2025년 의약품 점자 및 접근성 코드 표시 실태 모니터링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의무 대상 의약품 39종 중 56.4%(22종)가 점자조차 표기하지 않았고, 음성안내가 실제 작동하는 제품은 단 2종(5.1%)에 불과했다. 

생리대·손소독제 등 의약외품은 72종 중 71종(98.6%)이 점자 표기를 전혀 하지 않아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법은 시행됐지만, 시각장애인의 '약 먹을 권리'는 여전히 공허하다.

이번 조사는 올해 7월부터 10월까지 의약품 39종과 의약외품 72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특히 의무화 대상 39종 중 17개 제품만이 현장에서 구매돼 시각장애인 당사자의 촉지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구매한 의약품 사진.ⓒ실로암시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현장에서 직접 구매한 의약품 사진.ⓒ실로암시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촉지 평가 결과 "포장 뜯으면 정보 접근권 사라져"

17개 구매 제품에 대한 촉지 평가 결과, 점자가 표시된 의약품 전체(100%)가 외부 포장 상자에만 점자를 인쇄했다. 이는 시각장애인이 약을 먹기 위해 포장을 뜯는 순간, 약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가장 중요한 '내용물 용기(병, 튜브 등)'에는 점자가 전혀 없어 약 복용 시 정보 확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독성이다. 점자가 표기된 제품 중 28.6%는 점 간격이 좁거나 돌출이 약해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 조사원은 "점자를 찍기는 했는데, 손으로 더듬어도 뭔지 모르겠다. 장식용 점자냐"고 비판했다.

접근성 코드, '실질적 정보 전달' 기능 부재

접근성 코드가 표시된 제품 중 실제 음성 안내가 제공된 것은 단 2종 ('어린이부루펜시럽', '아로나민골드정') 뿐이었다. 나머지는 단순 웹페이지 연결이나 바코드 수준에 그쳐 사실상 정보 접근 기능을 제공하지 못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영상 정보는 전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각장애 1급 당사자인 김 모 씨(42)는 "집에 있는 약 5개 중 어떤 게 소화제고 어떤 게 진통제인지 구분이 안 된다"며 "매번 가족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혼자 있을 땐 그냥 안 먹거나 찍어서 앱으로 물어본다"고 말했다.

제약사별 이행 태도 '하늘과 땅' 차이

모니터링 조사 과정에서 제약사별로 점자코드 표기 의무 이행에 대한 태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A제약사는 점자코드 미표기 상태에서 향후 계획조차 밝히지 않았으며, 담당자 연결 자체를 거부했다. B제약사는 전화 문의 시 "이메일로만 문의하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C제약사는 "법적 의무 대상인지 확인이 필요하다"며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반면 지르텍(한국유씨비제약), 어린이부루펜시럽(삼일제약), 베아제정(대웅제약) 등은 담당자가 진행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샘플을 제공하는 등 모범적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법적 의무임에도 기업 간 온도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조사원 이 모 씨(35)는 "법이 생겼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바뀐 게 거의 없다"며 "점자가 있어도 포장 버리면 끝이고, 앱으로 스캔하면 '정보 없음'만 뜬다. 이게 법을 지키는 거냐"고 반문했다.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참고 조사된 의약외품 72종에 대한 전수 확인 결과, 생리대, 렌즈관리용액, 손소독제 등 생활밀접 제품임에도 점자표시는 단 1종(1.4%), 코드표시는 2종(2.8%)에서만 확인됐다. 시각장애인에게 생리대, 손소독제, 렌즈세정액은 여전히 '미지의 제품'이다.

"법적 제재 없다보니 제약사 외면, 약 먹을 권리 달라"

센터 지석봉 소장은 "법은 만들어졌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며 "제약사들이 법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제재가 없다 보니 외면하는 것"이라면서 "시각장애인이 약을 잘못 먹어 사고가 나기 전에 식약처가 강력한 단속과 처벌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센터는 이번 조사를 바탕으로 식약처에 ▲점자표시 품질 기준 제정 및 당사자 검수 의무화 ▲점자의 돌출 높이, 점간 간격 등 세부 표준을 법적으로 마련 ▲포장 상자뿐 아니라 실제 내용물 용기(병, 튜브)에도 점자 또는 대체 수단 표기 의무화 등의 제도 개선을 요구할 예정이다. 

지 소장은 "점자가 보인다고 해서 정보가 들리는 게 아니다"라며 "진짜 필요한 건 시각장애인이 혼자서도 안전하게 약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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